미래인에게

낙엽과 영수증


이제 막 내 것이 된 책을 펼쳐보다 서점에서 받은 영수증이 최고의 책갈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자. 일단 영수증은 얇다. 책 사이에 오래 끼워 넣어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책을 지나치게 살살 다루는 나 같은 사람은 그런 것에도 신경을 쓴다. 흔히 클립 형태의 책갈피가 있다. 클립 부분이 종이를 구기기 때문에 절대 사용하고 싶지 않다. 요철이 있는 책갈피도 피하자. 꽂고 그 위에 무거운 책을 올려두면 압인이 남는다. 위치도 신경 쓰이지 않는가? 책등에 가깝게 꽂아둔 책갈피를 보면 나는 접착면이 벌어지고 느슨해져 비가역적인 해제가 들어선 제본을 상상한다.


그런 면에서 영수증은 책갈피로 사용하기에 아주 적절한 물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최적의 두께를 가지고 있다. 얇지만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 동시에 종이로서의 물성도 훌륭하다. 테두리가 풀어지지 않고 이염도 잘 되지 않는다.

내용은 또 어떤가? 모든 영수증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영수증을 유심히 읽어본 적 있는가? 어쩌면 영수증에는 당신이 알던 것 보다 더 많은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매출가다. 영수증은 돈을 지불해야 받을 수 있다. 또 많은 영수증에는 무엇에 대한 지불이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책을 구매했다면 책 제목이 적혀 있다. 카페의 영수증이라면 커피를 마셨는지 차를 마셨는지 기록되어 있다. 요즘에는 영화관 티켓이 영수증으로 나오는데 어떤 영화를 몇시에 보았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 재미있다. 당신은 샌드위치에 피클을 빼는 사람일지 모르고 그 사실이 메뉴 아래 요청사항 부분에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에 더해 영수(명사: 돈이나 물품 따위를 받아들임.)의 위치와 시간을 제공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도 설명한다. 그 내용은 대충 적혀 있지 않다. 판매자의 이름, 장소의 호수, 시간의 초 단위까지 - 영수증은 그냥 버려지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정밀하다. 그런데 이 정밀함이 중요하다. 영수증을 사적인 쪽지와 구별짓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스스로 적은 기록이 아니라 세상이 발행한 기록이다. 그 객관성이 영수증을 단순한 기록에서 특별한 종류의 증거물로 승격시킨다.

이제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어느날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돈을 주고 "가게"라는 공공장소에서 수수료를 지불해 공증한다. 그리고 그것을 미래인(누군가, 미래의 자신을 포함한)에게 책을 매체로 전달한다.


언젠가 책장을 살피다 특별한 이유 없이 부모님이 넘겨준 책을 펼쳤는데 낙엽이 떨어졌다. 붉게 물든 단풍잎이었다. 20년은 되었을 나뭇잎은 빛바램 없이 그 해 그 계절의 색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 과거 나와 같은 나이를 가진 부모님의 삶과 세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느날 미래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내 책을 펼쳤는데 영수증이 떨어진다. 거기에는 나의 존재와 그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증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그리고 "왜"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좋다. 그는 그날 거기서 영수를 받아 무엇을 했을까? 누군가와 함께였을까 아니면 혼자였을까. 날씨는 어땠을까? 여유로운 주말이었을까 아니면 쉬지 못한 주말이었을까. 지출을 아까워했을까...아니면 만족했을까...

영수증은 마찰에 약하다. 자외선이나 습기에 노출되면 내용이 흐려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책과 영수증이 상보적인 관계라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간다. 철근과 콘크리트 같은 거다. 책은 영수증을 보호한다. 영수증은 그 책을 언제쯤 읽었는지, 그때의 나는 어떤 세상에 있었는지 증언한다. 그리고 미래인은 상상만 할 뿐이다. 내가 과거의 세상에 존재했던 모습을.

그러니 영수증을 버려달라고 하는 대신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자. 그리고 손이 주머니를 다시 찾을 때 꺼내 읽어보자. 그리고 책 사이에 끼워 넣고 잊어버리자.

쑹둥, 《물진기용》, 2005. MoMA 전시 전경, 2009.

투탕카멘 무덤 전실, 1922. 사진: Harry Burton. © Griffith Institute, University of Oxford

공상과 망상

0호: 미래인에게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부장품이 필요한가


죽는다면 부장품을 묻고 싶다. 긴 시간 만들어온 컬렉션이 죽음으로 사라진다면 아깝지 않은가? 누구나 잡동사니와 애장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을 그저그런 물건들이 둘러싸고 있는것을 원하지 않아서 애장품의 비율을 계속 키워나간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그런 사람이다. 금전적 제약 때문에 그저그런 물건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지만 - 어찌되었든, 노력 중이다.

그런 사람이라 죽은 다음에 내 (소중한)것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하면 맘이 편치 않다. 일단 상속인이 없다면 버려질 것이다. 상속인이 있다면 조금은 안심이지만 나한테 소중한 사물이 그에게도 소중하리라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조금 있다 버려질 뿐이다. 소중히 한다고 해도 상속인의 상속인도 그러할까?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그럴 바에야 미래인에게 전하는게 좋겠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온라인 서점에서 "부장품" 을 검색해본다. 신간은 없고 중고에 5개의 결과물이 있다. 그 중 3개 품목이 <고분출토 부장품 연구> 다. 나머지도 개별 유적지의 부장품에 대한 책이다. 혼자 상상할 수밖에 없다. 두가지 억지력이 떠오른다. 첫번째로 화장이 매장을 대체하고 있어 고인을 묻는 행위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두번째로 우리에게는 땅에 무언가를 묻는게 찝찝한 일이 되어버렸다. 공기도 깨끗이 땅 속도 깨끗이. 커져만 가는 쓰레기 매립지를 걱정하는 세상에서 부장품을 묻는 행위는 악행이다.

그럼에도 컬렉션을 버릴 수 없다면 통시적으로 당위성을 찾아야 한다. 열정적인 미래의 고고학자를 떠올려보자. 그는 생분해 플라스틱을 발명한 고대인의 노력에 아쉬움을 표하고 분해되지 않은 쓰레기를 환영할 거다. 달리 방법이 없다. 우리가 무슨 위인이라고 컬렉션을 박물관에 보전해줄까? 보전한다해도 세월의 풍파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어제 가치 있던 게 오늘은 가치 없기도 하다. 전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땅 위에 있는 것은 불타 하늘로 날아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오직 흙 속에서 과거의 증거들이 살아남았다.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겨울 이불같이 두툼한 토양층이 필요하다.

우리는 부장품을 보고 고대의 사람들이 영생을 꿈꾸었네, 망자의 신분이 높았네 낮았네 따져든다. 거기 우리 이야기를 더하기 위해 지하공간을 좀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땅속에 남은게 무시무시한 핵 폐기물 뿐이어서 미래인이 우리를 "환경 보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핵 폐기물은 미래인이 알아서 하겠지 라고 생각해 남긴 모순적인 존재" 라고만 생각하는건 재미없다. 그보다는 "평민 출신으로 보이는 21세기 아무개의 무덤에서는 다량의 광학 디스크가 출토되었다. 표면의 도안과 문자로 보아 유희 목적의 매체로 추정된다. 한 점에는 Metal Gear Solid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기계교적 의식과의 연관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이런 식의 이야기가 돌게 하고 싶다.

미래인과 소통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먼저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나의 경우라면 우선 책들을 떠올리게 된다. 별로라고 생각하는 책들은 이미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읽은 책들은 일단 다 넣어야겠다. 아마 죽을때까지 읽지 못한 책들도 많을 것이다. 아까우니 목록에 넣자. 딱히 이야기로써도, 출판 매체로써도 흥미롭지 않은 책들도 있다. 그래도 내 경험을 증명함에 있어 가치는 충분하다. 이렇게 추리다 보니 내가 가진 책장은 책의 합으로써 흥미롭다; 어렸을 때 부터 지금까지 내가 관심을 가졌던것, 가지고 있는 것을 증언해 지적 자아형성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장을 통째로 묻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중앙의 관을 머리 높이의 책장이 둘러싸고 있는 조용하고 낮은 방을 상상 해본다. 내가 손으로 만졌던 책들이 아직 함께하고 있다. 좀 안심이 된다. 무덤이 그렇게 차갑지는 않을 것 같다. 이왕이면 책상을 하나 넣는 것도 좋겠다. 책 말고도 흥미로운 물건들이 있다. 요즘의 나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컵들을 몇개 구매했는데 아무래도 계속 늘어날 것 같다... 도자기라니 부장품 전통에 딱 맞지 않는가? 책상 한쪽에 예쁜 컵과 접시들을 올려놓는다. 하루에 10시간씩 부둥켜안고 있는 랩탑도 놓아야지. 책상이 있으니 당연 의자도 놓아야 한다.

투탕카맨의 무덤이 떠오른다. 발굴 직후 무덤의 전실을 찍은 사진은 온갖 잡다한 집기들이 쌓인 방을 보여준다. 그 배치에서 계속 늘어나는 목록을 상상할 수 있다. 제사장과 그가 부둥켜안고 있는 석판을 상상해 보자. 가장 중요한 것들은 위에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간은 남고 궁전에는 물건이 넘친다. 계속 적고, 옮긴다. 그러다보면 내 손이 닿은 모든 것을 묻게 되는 것이다.


집을 묻는 꿈

이제 나는 집을 통째로 묻고 싶어졌다. 중국 작가 쑹둥(Song Dong)의 어머니가 한 것처럼 말이다. 그의 어머니 자오샹위안은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결핍을 겪으며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빈 치약 튜브, 플라스틱 병뚜껑, 쇼핑백, 비누 조각 -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베이징의 작은 집에 보관했다. 2002년 남편이 사망한 뒤 그 습관은 강박이 되었고, 아들과 딸이 정리를 시도하면 격렬히 반대했다. 쑹둥은 어머니의 물건을 버리는 대신 작품으로 만들기로 했다. 2005년 만 점이 넘는 생활용품을 종류별로 정렬해 갤러리 바닥에 펼친 설치 작품 <물진기용(物尽其用, Waste Not)>이 베이징에서 처음 전시되었다. 어머니는 기뻐하며 말했다. "물건을 모아둔 게 쓸모가 있었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관객들은 전시를 보며 "이건 당신 집만이 아니라 내 집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자오샹위안의 컬렉션은 땅에 묻히지는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감상자를 찾았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시대의 일면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부장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예시한다. 그러나 그녀의 경우는 아주 운이 좋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실제로는 알아봐주는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다. 자오샹위안은 얼마 안되어 2009년 MoMA 전시 설치 중에 세상을 떠났다. 조금만 늦었다면, 혹은 그녀의 아들이 물건 더미를 가치롭게 여기지 않았다면 그녀가 모아온 것들은 쓰레기로 버려졌을 것이다.

한편 저장강박을 hoarding(호딩) 이라고 하는데 <옥스포드 고고학 간편 사전(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of Archaeology)> 에 따르면 hoard 는 "온전하거나 파손된 사물들을 이후의 회수 또는 상징적 행위로서 한 시점에 의도적으로 땅에 묻은 매장물에 적용되는 용어..." 다. 흥미롭게도 광적인 수집품은 그 어원을 따르면 언젠가의 필요를 위해 땅에 묻힐 것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아진 것에는 수집의 노력 혹은 주인이 그 안에서 본 것 때문에 소중함이 깃들기 마련이고, 소중한 것을 그냥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려야 할 때에도 우리는 그것이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 말한다. 부장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사물이 망자의 사후에 필요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망자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는가?

애정을 가지고 물건들을 모았다면 더 큰 환대를 상상하는건 자연스럽다. 호더가 그들의 방해자에게 적대적인걸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호딩은 특히 아름다움과 필요성에 대한 설명을 완전히 유보한다는 점에서 더 과감한 기획이다. 그들은 모른다. 그 더미가 미래의 언젠가 필요할 것임을. 그리고 미래를 위해 더미들은 땅 속에 묻혀야 한다. 땅 속에 묻은 것들은 필요한 수신자에게 전달되지 못해야만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다.

사물을 신중히 고르는 행위에는 아름다움의 편린에 대한 반응이 담겨 있다. 그건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낙관이다.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이 마음에 꼭 맞는 머그잔을 고르고 고르는걸 상상할 수 있는가? 무심한 눈은 아름다움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신중하게 과거를 살피는 미래인에게는 보일 것이다. 땅에 버린 것은 쓰레기였다가 썩지 않고 한 천년 쯤 지나면 보물이 된다. 썩지 않는 부분이 어렵다. 가능성 낮은 도박이다. 그래도 나는 호기심 많은 그 눈을 위해 이야기를 묻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