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자르다 벤 상처. 건축 모델을 만들 때는 더 날카로운 30도 커터칼과 쇠 자를 사용한다. 두꺼운 재료를 자르다 보면 힘이 들어가고 그렇게 긋다 보면 때때로 칼날이 튀어 쇠 자의 윗면에서 미끄러진다. 마지막 상처를 떠올리면 아직도 오금이 저릿하다. 건축 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로 모델을 만들다 미끄러진 커터칼을 멈추지 못해 자를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의 손톱까지 그대로 그어버렸다. 뚝뚝 피가 떨어지는데 직원들 전부가 회의를 하고 있어서 어떻게 할까 당황하던 기억이 난다. 근처 병원에 가서 세 바늘 꿰맸다. 바로 위에 학교에서 만든 흉터도 있다. 건축가 중 몇 명과 같은 흉터를 공유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알아보는 사람은 알아볼 것이다.
손
소지에 핸드폰을 얹어 사용하다 보니 끝 마디가 안쪽으로 휘었다. 이런 걸 Phone Pinky라고 한단다. 반면 어릴 때 가지고 있던 연필 쥐던 마디의 굳은살은 사라졌다. 그건 Pencil Bump라고 한단다.
왼손은 두 줄인데 오른손은 세 줄이다. 가운데 희미한 세로 선이 있어서 왕(王)자 처럼 보인다. 왼손은 선천적인 운명을 의미하고 오른손은 후천적 노력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윤모씨가 손바닥에 왕자를 그린 일 때문에 웃겨졌다.
약지랑 모양이 너무 달라 잘 보면 한 손에 두 사람의 손가락을 하나씩 가져다 붙여놓은 것 같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클라이밍을 하다 다친 건데, 지금은 쉬고 있어서 통증은 없고 모양만 그대로다.
요즘 웨이트로 운동을 하고 있어서 생긴 굳은살. 환경에 적응해 성질을 바꿀 수 있다니. 또 다른 인체의 신비.
침범하는 손
손은 스위스 아미 나이프다. 손은 그러쥐고, 긁고, 집고, 찌른다. 흙을 체 칠 수도 있다. 좁은 구멍에서 물건을 빼낼 수도 있으며 종이와 같이 얇게 붙은 면을 갈라내기도 편하다. 물 그릇 기능까지 내장되어 있으니 참으로 다재다능한 도구다. 기능이 많은 만큼 다른 동물의 손과 비교하면 하찮아 보이기도 하는데 손에 대응되는 다른 동물의 기관은 전문 도구의 아우라를 뿜기 때문이다. 새는 나뭇가지에 앉을 때 힘줄이 당겨져 발가락이 자동으로 오므라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단다. 얼마나 알맞은 도구인가. 덕분에 새는 별 힘 들이지 않고도 안전하게 매달려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손이 유용한 손도구라면 동물의 손은 전문화된 기계다.
다만 그 어중간한 도구에도 유독 날이 잘 선 기능이 하나 있으니 바로 쓰다듬기다. 쓰다듬기가 흥미로운 건 전문화의 관점에서 우리의 친척인 유인원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동물도 이 기능을 우리만큼 발달시키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돌고래의 손이 수영하는 손인 만큼 인간의 손은 쓰다듬는 손이다.
우리는 쓰다듬기를 통해 늑대를 길들였다. 그리고 인터넷에 따르면, 시간만 충분할 경우 사람은 다른 어떤 동물도 쓰다듬기로 길들일 수 있다. 악어라도 어릴 때부터 쓰다듬으면 당신의 친우가 되는 것이다(목뒤 긁기에 웃는 악어를 보지 못했다면 인터넷이 더 열심히 해보자). 길들이지 못했다면 더 많이 쓰다듬을 것. 주먹을 쥐어 때릴 때보다 쓰다듬을 때 우리는 대상을 더 깊게 굴복시킨다. 이 사실은 세상의 어떤 일반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은가? 찬 바람이 아니라 따듯한 햇빛이 승리한다는. 개도 고양이도 말도, 사자도 코끼리도 그리고 새도 쓰다듬기를 좋아한다. 물고기는... 모르겠다. 식물도 쓰다듬기에 반응할까?
확실한 건 털이 난 것은 죄다 쓰다듬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털도 깃털도 비늘에서 진화했다고 한다. 그럼 그 이전 언젠가 원종이 피부의 약한 마찰을 좋아하게 됐다는 뜻이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빙하기의 땅굴에서 체온을 나누던 먼 조상 동물들을 떠올려보자. 피부로 느끼는 다른 몸의 마찰과 그것의 열기는 생존에 대한 강한 신호로 작용했을 거다. 짝이 옆에 몸을 부대낄 때도 동일한 보상 회로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인간은 그리하여 사랑의 손을 발전시켰다..."
그렇게 보면 쓰다듬기는 사랑의 흉내다. 우리를 만지는 손은 우리가 유아였을 때 느끼던 보호자의 의태다. 그건 새끼를 핥는 고양이의 혀다. 쓰다듬기는 세상의 적대를 대신 감당해주는 대리자가 있어 평화로웠던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테리 비슨의 〈나는 그 빛을 보았다〉라는 단편에서 주인공 집단은 달의 표면에서 발광하는 빛의 정체를 확인하러 떠난다. 그들은 거기서 검은 피라미드를 발견하고, 내부로 들어가 "머리를 쓰다듬는 밝은 빛의 손"을 느낀다. 빛의 존재는 말을 하지 않지만 반복된 만남에서 주인공은 그들이 신과 같은 존재임을 - 인간을 지구에 풀어주고 달까지 자신들을 만나러 올 수 있는지 시험했음을 알게 된다. 결말에서 외계인들은 실망을 안고 달을 떠난다. 인류가 지성을 발전시키긴 했지만 자신들의 손짓에 기쁨밖에 느끼지 못하는 길들여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주체와 대상을 반전시켜 쓰다듬기의 대상이 되어보는 독특한 느낌을 제공한다. 그 느낌은 곤충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행동을 조종하는 가장 심오하고 기발한 기생충의 생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탄과 연결된다. 우리의 손은 동물의 마음을 자극해 굴복시키도록 진화했다. 침범받지 않아야 할 것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다. 이때 쓰다듬기는 사랑을 흉내 내는 기만이지 않은가?
나는 미용실에 가는 걸 계속 미루는데 타인이 내 머리를 만지는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불쾌감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애정 없는 손에서 애정의 느낌을 받기 싫어서다. 허락하지 않은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느낌을 받기 싫어서다.
가장 최근에 얻은 상처. 알루미늄 프로파일로 가구를 만들다가 육각 볼트로 두 부품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느슨하게 쥔 부품이 함께 돌아 날카로운 모서리에 깊게 패었다. 주말이었고 밤이었다. 혼자 살면 주변에 호들갑 떠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병원을 찾아가기 힘들어진다. 모세혈관이 점점이 보이는 흰 살까지 파인 깊은 상처였다. 병원을 갔으면 한두 바늘은 꿰맸을 성싶은. 꾹 누르고 순간접착제를 찾아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붙였다.
평소에는 모르지만 운동하면 좌우 신체의 능력차가 즉각 느껴진다. 한쪽이 약한 것도 그런데 다루는 능력 - 소프트웨어적으로도 질이 떨어지는 게 항상 신기하다. 같은 내 몸인데 말이다. 특정 근육에 힘을 집중하는 능력과 여러 동작들을 부드럽게 연속하는 능력이 몸의 왼쪽에서 현저히 떨어진다. 케틀벨을 팔목에 얹는 동작에서 왼쪽만 부딪히면서 멍이 들었다.
짝과 함께 수화를 배우는 일은 내 작은 환상들 중 하나다. 외국어로서. 우리는 조용히 떠들석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 까페는 시끄럽지만 우리는 서로를 분명하게 듣는다. 말 할때면 우리는 서로를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그건 더 풍부한 말하기다. 입은 작고 손은 크다. 벌린 입보다 펼친 두 팔이 넓다. 신호등 건너편에서 대화를 시작하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만 받고 의미는 전달하지 말자. 말하기는 춤이 될 수도 있다. 말하기는 주먹질일 수도 있다. 싫은 얼굴에 대고 욕하기. 잎과 손으로 두말하기.
손 잃어버리기
아주 오래 전 언젠가 "나는 손이 작은 것 같아" 라고 했더니 tv를 보던 엄마가 "작은 손이 재주가 많아" 라고 답했다. 그 말은 이후의 삶에서 때때로 떠올리는 부적이 되었다.
말대로 나는 어릴 때부터 종이접기라든가 손으로 하는 공작들이 좋았다. 썩 잘 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기타 연주로 손을 열심히 놀렸다. 대학교는 건축과를 택했는데 손으로 만드는 작업을 싫어했다면 그 과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건축은 특히 손을 많이 사용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손으로 도면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야 한다. 손재주가 없었다면 학교 다니는 게 더 싫었을 것 같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이미 도면 작업이 완전히 디지털화 되어서 CAD(computer aided design - 컴퓨터 지원 설계)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게 기본이었는데 모두가 거기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어떤 선생님들은 손으로 그리는 게 중요하다며 커리큘럼 일부를 할애해 자와 연필로 도면 그리는 연습을 시켰다. 그들의 논지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 손으로 그리는 속도가 생각의 속도에 더 가깝고 따라서 숙고할 틈을 만들어준다. 둘, 손그림의 모호성이 창의적 발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들도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효용성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건축가로서의 숙련을 위해 손의 연습이 좋다는 것이었음이라. 그 주장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디지털화되었다고 손 작업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모형을 만드는 손과 마우스를 움직이고 클릭하는 손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만족감이 있다. 둘 다 능숙해질수록 정확도와 속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수많은 반복 작업을 통해서만 능숙해짐을 느낄 수 있으며 "손재주가 없는" 사람의 디지털 도면은, 손으로 그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저분하다는 게 나의 경험적인 관찰 결과다. 또한 잘 친 CAD 도면은 작성자로 하여금 손으로 만든 것과 동일한 만족감의 대상이 된다.
마우스와 함께 성장한 세대에게 커서는 모니터 안으로 연장된 손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 세계의 손보다 더 다양한 도구를 그러쥘 능력을 가진다. 흔히 사용하는 일러스트레이션 소프트웨어를 보면 사용자는 현실의 손이 그러는 것처럼 붓질도 할 수 있고 가위로 오려낼 수도 있다. 또 조각들을 선택해 원하는 크기로 줄이고 늘리는 스케일 도구처럼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도구들도 있는데, 이를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능력을 얻을 수도 있다. 연필로 깔끔한 선을 그리는 능력을 잃은 대신 더 많은 가능성으로 보상 받는 것이다.
AI가 대두되면서 디지털 손 노동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무력감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데 기성 건축가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한땀한땀 손으로 직조해내던 픽셀 뭉치들을 이제는 지시문 몇 줄이 뚝딱 만들어낸다. 우리가 수천 시간의 디지털 손짓을 통해 익힌 노하우들이 다 쓸모없어져 버렸다! 물론 이건 과장이다. 인간의 정밀 조정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그럴까?
창작 작업은 이제 나와 연결된 손 대신 알아듣는 듯 아닌 듯한 에이전트들과 말로 협상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다음 세대의 건축가는 손으로 도면을 그린다는 걸 상상도 못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나와 동시대 건축가는 이렇게 불평할 수도 있다: 도면은 역시 CAD로 쳐야지.
러다이트 운동의 파괴자들이 느꼈던 것을 우리가 똑같이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알아듣는 인공(유사)지능과 기계손이 대신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역할은 입으로 축소된다. 에이전트와의 말씨름 속에서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답답함과 언젠가의, 이제는 잃어버려 알 수 없는, 우리의 신체적 동작으로 결과물을 빚어내는 더 직접적인 방법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먼 미래에는 모두가 보이지 않는 에이전트에게 말을 걸고 있다. 허공을 향한 중얼거림이 아무런 눈짓도 받지 않는다. 나는 한편으로는 열심히 말을 하면서 두 손으로는 다시 종이를 접고 있을 수도 있다. 도시의 생활을 보라. 우리는 돈과 시간을 들여 손 움직일 상황들을 만들고 있다. 도자기나 목공 수업과 같은 공예는 이미 오랫동안 유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가드닝, 바느질과 뜨개질 등이 목록에 추가된 듯하다. 그 모든 활동들에서 결과물의 완성도는 부차적이다. 결과물의 가치는 내가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자기효능감에서 나온다.
새삼스럽게 내 손을 본다. 자판 위에 살짝 웅크리고 있는 손. 내가 완전히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손. 손도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다른 부분들처럼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한다. 내 두 손은 그렇게 작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체형에 딱 맞는 보통의 크기 같아 보인다. 지금도 나는 손을 써서 무형의/유형의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엄지손가락 아래 손바닥에 1cm쯤 되는 직선의 살덩이가 돋아나 있는데 책장을 만들다가 알루미늄 프로파일의 단면에 베여 만들어진 최신의 상처다. 조금 이상하지만 손을 쓰다가 다치는 데는 기쁨이 있다. 상처는 서투름을 겪었음에 대한 증거고 서투름은 새로운 동작을 익히고 그 동작으로 무언가를 만들었음에 대한 증거다. 손은 오직 그것만이 제공하는 기쁨을 제공한다. 내 두 손은 언제나 재주가 많기 위해 연습 중일 것이다.